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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푸어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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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밸푸어 선언은 1917년 11월 2일 당시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가 유대인 지도자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보낸 서한으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민족의 고향 건설을 지지하는 영국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했다. 이 선언은 시온주의 운동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팔레스타인 내 비유대인 공동체의 권리 및 다른 국가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권리 보호를 약속했다. 밸푸어 선언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미국의 참전을 유도하고, 러시아 내 유대인들의 영향력을 활용하며, 독일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영국의 전략적 목적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이 선언은 아랍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며 유대인과 아랍 세력 간의 분쟁을 초래했고, 이스라엘 건국과 중동 지역의 아랍-유대 갈등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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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푸어 선언
문서 정보
문서 이름밸푸어 선언
밸푸어가 로스차일드에게 보낸 원본 편지에 포함된 밸푸어 선언
생성일1917년 11월 2일
문서 위치대영 도서관
작성자월터 로스차일드 (제2대 로스차일드 남작)
레오 에이머리
알프레드 밀너
서명인아서 밸푸어
목적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에 민족 고향을 건설하는 것을 지지하며, 두 가지 조건을 제시
역사적 배경
배경제1차 세계 대전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영국의 정책 결정 과정에서 발표됨
시오니즘 운동이 선언은 당시 유대인들의 시오니즘 운동의 중요한 성과 중 하나였으며, 유대 민족의 국가 건설을 위한 국제적 지지를 얻는 데 큰 영향을 미침.
영국 정부의 의도영국 정부는 전쟁 중 유대인의 지원을 얻고, 전후 중동 지역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이 선언을 발표함
주요 내용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을 위한 민족적 고향을 건설하는 것을 지지한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종교적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른 국가에 있는 유대인의 권리와 정치적 지위에 영향을 주지 않아야 한다.
관련 인물
주요 인물아서 밸푸어: 당시 영국 외무장관
월터 로스차일드 (제2대 로스차일드 남작): 영국의 유대인 지도자
기타레오 에이머리 와 제1대 밀너 자작 알프레드 밀너
영향
정치적 영향이 선언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켰으며, 이스라엘 건국과 팔레스타인 문제의 중요한 원인이 됨.
이스라엘 건국이 선언은 이스라엘 건국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으며,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것을 장려함.
논란이 선언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복잡성을 야기했으며, 아랍인들은 이 선언을 자신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함.
추가 정보
로마자 표기Balfour Declaration (밸푸어 데클러레이션)
히브리어 표기(하츠하랏 벨푸르)

2. 선언의 내용

1917년 11월 2일, 당시 영국 외무장관이었던 아서 밸푸어는 유대인을 대표하는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공식적으로 보냈다.[1] 이 편지는 타자로 작성되었으며, 맨 밑에는 아서 밸푸어의 서명이 있었다.

이 선언문은 67단어의 한 문장으로, 1917년 11월 2일 밸푸어가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보낸 짧은 편지에 실려 영국 및 아일랜드 시온주의 연맹에 전달되었다. 선언문에는 네 개의 조항이 포함되어 있는데, 처음 두 조항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민족의 국토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할 것을 약속했고, 그 뒤에는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기존의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및 종교적 권리"와 "다른 어떤 나라에서 유대인들이 누리는 권리와 정치적 지위"에 관한 두 개의 "보호 조항"이 뒤따랐다.

밸푸어 선언은 영국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서 팔레스타인에 민족적 고향 건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그 지원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이 방침은 1915년 10월, 영국의 이집트 고등판무관 헨리 맥머혼이 아랍 지도자인 메카 총독 후세인 빈 알리와 체결한 '''후세인-맥머혼 협정'''(맥머혼 선언)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여 문제가 되었다. 이 협정에서 영국 정부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제1차 세계 대전)에 협력하는 것을 조건으로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아랍인들의 독립을 승인한다고 밝혔다. 후세인은 이 영국 정부의 지원 약속을 받아 헤자즈 왕국을 건국했다.

한편으로는 팔레스타인에서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유대인들에게 지원을 약속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랍인들에게도 독립을 승인한다는 영국 정부의 '''이중 외교'''가 현재까지 이어지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원인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후세인-맥머혼 협정에 규정된 아랍 국가의 범위에 팔레스타인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두 가지는 모순되지 않는다. 후세인 빈 알리는 예루살렘시의 통치권을 제외하고는 지중해 쪽 팔레스타인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이, 후일 그의 아들 파이살과 하임 바이츠만 박사와의 회담에서 증명되었다. 밸푸어 선언 원문에는 "유대 국가"가 아니라,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national home"(내셔널 홈, '''민족 고토''')로 표현되어 있으며, 팔레스타인 원주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명시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약속은 1916년 5월 영국, 프랑스, 러시아 사이에 체결된 비밀 협정, '''사이क्स-피코 협정'''과도 모순되는 것처럼 보여 문제가 되었지만, 내용을 보면 실제로는 시리아 다마스쿠스 부근의 경계 설정이 모호한 것 외에는 특별히 모순되지 않는다.


  • 메소포타미아는 영국의 자유 재량→보호국으로서의 아랍인 주권 국가 이라크 탄생.
  • 레바논은 프랑스의 위임 통치→레바논은 후세인-맥머혼 서한에서 규정된 아랍 국가의 범위 밖이다.(후세인-맥머혼 협정도 참조)
  • 시리아는 프랑스의 보호하에 아랍인 주권 국가가 된다→이것 또한 후세인-맥머혼 서한의 내용과 크게 모순되지 않는다. 다만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 부근에 대해서는 프랑스 통치령인지 아랍 지역인지 모호한 부분이 남았다.
  • 팔레스타인에 관해서는, 상술한 바와 같이 "거주지"로서의 해석도 있으며, 후세인-맥머혼 서한에서 규정된 아랍 국가의 범위 밖이다. 어디까지나 거주지이기 때문에 국제 관리를 규정하는 사이크스-피코 협정과 모순되지 않는다. 따라서 적어도 발포어 선언과 다른 두 개의 협정 사이에는, 문면상으로는 아무런 모순도 없다.

2. 1. 원문 및 번역



November 2nd, 1917|1917년 11월 2일영어

Dear Lord Rothschild|존경하는 로스차일드 경영어

I have much pleasure in conveying to you, on behalf of His Majesty's Government, the following declaration of sympathy with Jewish Zionist aspirations which has been submitted to, and approved by, the Cabinet.|저는 영국 정부를 대신하여, 유대인 시오니스트 운동에 공감하는 다음과 같은 선언이 내각에 제출되어 승인되었음을 기쁘게 알려드립니다.영어

"His Majesty's Government view with favour the establishment in Palestine of a national home for the Jewish people, and will use their best endeavours to facilitate the achievement of this object, it being clearly understood that nothing shall be done which may prejudice the civil and religious rights of existing non-Jewish communities in Palestine, or the rights and political status enjoyed by Jews in any other country".|「영국 정부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민족적 고향을 건설하는 것을 호의적으로 생각하며, 그 목표 달성을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단, 이는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비유대인들의 시민권, 종교적 권리, 그리고 다른 나라에 사는 유대인들이 누리는 여러 권리와 정치적 지위를 해치는 것이 아님이 명확히 이해되어야 합니다.」영어[1]

I should be grateful if you would bring this declaration to the knowledge of the Zionist Federation.|이 선언을 귀하를 통해 시오니스트 연맹에 전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영어

Yours sincerely,|경의를 표하며영어

Arthur James Balfour|아서 제임스 밸푸어영어

1917년 11월 2일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아서 밸푸어가 이끄는 영국 외무성이 당시 유대인을 대표하는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위와 같은 편지를 공식적으로 보냈다. 편지는 타자로 작성되었으며 맨 밑에는 아서 밸푸어의 서명이 있다.

위 편지의 ""부분을 한국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국왕 폐하의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조국을 수립하는 것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비유대인의 정치적 권리와 종교적 권리, 또는 다른 모든 나라에서 유대인이 누리는 권리와 정치적 상황이 절대로 침해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납득하고 있습니다."

발푸어 선언은 영국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거주지(국가적 보금자리) 건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그 지원을 약속하고 있다.

발푸어 선언의 알려진 초안 목록 (각 초안 간의 변경 사항 표시)
초안텍스트변경 사항
예비 시오니스트 초안
1917년 7월
전하의 정부는 시오니스트 조직의 목표를 고려한 후, 팔레스타인을 유대 민족의 국토로 인정하고 전쟁의 성공적인 결과에 따른 평화 체결 후에 수립될 보호 아래 팔레스타인에서 유대 민족이 국가 생활을 건설할 권리를 인정하는 원칙을 받아들입니다.
로스차일드 경 초안
1917년 7월 12일
1. 전하의 정부는 팔레스타인이 유대 민족의 국토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받아들입니다.
2. 전하의 정부는 이 목표의 달성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시오니스트 조직과 필요한 방법과 수단을 논의할 것입니다.
[9]
1. 전하의 정부 [*] 을 인정하는 원칙을 팔레스타인이 유대 민족의 국토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받아들입니다. [*]
2. 전하의 정부 [*] 는 이 목표의 달성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필요한 방법과 수단을 시오니스트 조직과 논의할 것입니다.
* 많은 분량의 텍스트 삭제됨
발푸어 초안
1917년 8월 중순
전하의 정부는 팔레스타인이 유대 민족의 국토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받아들이며, 이 목표의 달성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시오니스트 조직이 제시할 수 있는 이 문제에 대한 모든 제안을 검토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9]1. 전하의 정부는 팔레스타인이 유대 민족의 국토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2.전하의 정부는 그들의 최선을 다할 것이며, 필요한 방법과 수단을 시오니스트 조직과 논의할 것이며 시오니스트 조직이 제시할 수 있는 이 문제에 대한 모든 제안을 검토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밀너 초안
1917년 8월 말
전하의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국토를 건설할 수 있도록 모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원칙을 받아들이며, 이 목표 달성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시오니스트 조직들이 제시하고자 하는 이 문제에 대한 모든 제안을 검토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9]전하의 정부는 팔레스타인이 유대 민족의 국토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국토 건설을 위한 모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원칙을 받아들이며, 그들의 최선을 다하여 확보할 용이하게 할 것이며, 시오니스트 Oorganisations가 제시하고자 하는 이 문제에 대한 모든 제안을 검토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밀너-에이머리 초안
1917년 10월 4일
전하의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을 위한 국토를 건설하는 것을 찬성하며, 이 목표 달성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팔레스타인에 있는 기존의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및 종교적 권리 또는 기존의 국적에 완전히 만족하는 유대인들이 다른 나라에서 누리는 권리와 정치적 지위를 침해하는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습니다.[9]전하의 정부는 모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원칙을 받아들이는 대신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 을 위한 국가적인 국토를 건설하는 것을 찬성하며, 이 목표 달성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그리고 시오니스트 조직들이 제시하고자 하는 이 문제에 대한 모든 제안을 검토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팔레스타인에 있는 기존의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및 종교적 권리 또는 기존의 국적에 완전히 만족하는 유대인들이 다른 나라에서 누리는 권리와 정치적 지위를 침해하는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습니다..[9]
최종본전하의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국토를 건설하는 것을 찬성하며, 이 목표 달성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팔레스타인에 있는 기존의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및 종교적 권리 또는 다른 나라에서 유대인들이 누리는 권리와 정치적 지위를 침해하는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습니다.전하의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 을 위한 국토를 건설하는 것을 찬성하며, 그들의 최선을 다하여 이 목표 달성을 용이하게 할 것이며, 팔레스타인에 있는 기존의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및 종교적 권리 또는 다른 나라에서 유대인들이 누리는 권리와 정치적 지위를 침해하는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국적에 완전히 만족하는 유대인들이 다른 나라에서 누리는 권리와 정치적 지위를.[9]


2. 2. 용어의 모호성

"민족적 고향(national home)"이라는 용어는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사용되었다.[10] 이는 국제법상 명확한 정의가 없는 용어였으며,[11] "국가"와 같은 다른 용어에 비해 그 의미가 불분명했다.[11] 영국 내각 내에서 시온주의 프로그램에 대한 반대 때문에 "국가" 대신 의도적으로 이 용어를 사용했다.[11] 역사학자 노먼 로즈에 따르면, 선언의 주요 설계자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대인 국가가 등장할 것으로 예상했으며, 팔레스타인 왕립 위원회는 그 표현이 "궁극적으로 유대인 국가의 수립을 고려한 장관들과 그렇지 않은 장관들 사이의 타협의 결과"라고 결론지었다.[40]

선언의 최종본으로 이어지는 서신에서 그 표현의 해석을 찾으려고 했다. 1917년 9월 22일, 사이크스는 전쟁 내각에 보낸 공식 보고서에서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이나 팔레스타인의 어떤 지역에도 유대인 공화국이나 기타 어떤 형태의 국가도 세우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오히려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에 규정된 어떤 형태의 보호령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한 달 후, 커즌은 1917년 10월 26일에 배포된 각서를 작성하여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 민족을 위한 국토"라는 구절의 의미에 대해 다루면서, 완전한 국가부터 유대인을 위한 단순한 정신적 중심지까지 다양한 의견이 있다고 언급했다.

커즌 경의 1917년 10월 26일 내각 각서. 선언 1주일 전에 배포되었으며,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 민족을 위한 국토"라는 구절의 의미를 다루고 있으며, 다양한 의견을 언급하고 있다.


1919년 1월, 발푸어는 커즌에게 보낸 답장에서 "바이츠만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정부에 대한 주장을 제기한 적이 없습니다. 제 생각에 그러한 주장은 명백히 허용될 수 없으며, 저는 로스차일드 경에게 한 원래 선언 이상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썼다.

1919년 2월, 프랑스는 팔레스타인을 영국의 수탁 통치하에 두고 유대인 국가를 형성하는 데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유다 블룸은 프랑스의 "유대인 민족 운동에 대한 비우호적인 태도"를 논의하면서, 1920년 11월 로버트 반시타트(파리 강화 회의 영국 대표단의 주요 구성원)가 커즌에게 제출한 보고서 내용을 언급했다.

그리스 외무장관은 살로니카 유대인 기관 프로이스라엘의 편집자에게 "유대인 국가의 수립은 그리스에서 충분하고 진심 어린 동정심을 얻고 있습니다... 유대인 팔레스타인은 그리스의 동맹국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스위스에서는 토블러, 포렐-이보른, 로가즈 교수 등 여러 저명한 역사가들이 유대인 국가 수립이라는 생각을 지지했으며, 한 역사가는 이를 "유대인의 신성한 권리"라고 언급했다. 독일에서는 관리들과 언론의 대부분이 선언을 영국이 후원하는 유대인 국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처칠을 포함한 영국 정부는 선언이 팔레스타인 전체를 유대인 국토로 전환하려는 의도가 아니었고, "팔레스타인에 그러한 국토가 설립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에미르 피살은 시온주의 지도자 차임 바이츠만과 T. E. 로렌스가 작성한 공식적인 서면 합의를 맺고, 팔레스타인에서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 평화로운 관계를 수립하려고 노력했다.[19] 1919년 1월 3일 피살-바이츠만 협정은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국토 개발에 대한 아랍-유대인 협력을 위한 단명한 협정이었다. 피살은 1919년 2월 6일 강화 회의에 대한 발표에서 "보편적인 성격을 가진 팔레스타인은 [관계된 모든 당사자의] 상호 협의를 위해 제쳐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20] 그러나 이 협정은 결코 이행되지 않았다. 로렌스가 피살의 서명을 위해 영어로 작성한 후속 서한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29년 쇼 위원회에 제출된 편에서, 루스탐 하이더는 바그다드에서 피살과 이야기했고, 피살이 "그런 종류의 것을 쓴 기억이 없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고 밝혔다. 1930년 1월, 하이더는 바그다드의 신문에 피살이 "그러한 문제가 그에게 귀속된다는 것은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며, 그는 어느 때에도 외국 국가가 아랍 국가를 공유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썼다고 밝혔다. 피살의 비서 아우니 압드 알-하디는 회고록에서 프랑크푸르터와 피살 사이의 회의가 있었는지 알지 못했으며, "저는 이 편지가 진정한 것이라고 가정할 때 로렌스가 작성했고, 로렌스가 피살을 대신하여 영어로 서명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편지가 차임 바이츠만과 로렌스가 여론을 오도하기 위해 제기한 허위 주장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썼다. 알라위에 따르면, 프랑크푸르터 편지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회의가 있었고, 로렌스가 영어로 편지를 작성했지만, "그 내용이 피살에게 완전히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는 당시의 다른 공개 및 비공개 성명과 상반되었기 때문에 그것에 서명하도록 유도되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라고 한다. 1919년 3월 1일, 피살은 르 마탱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다른 종교에 대한 존중의 감정은 우리 이웃인 팔레스타인에 대한 저의 견해를 결정합니다. 불행한 유대인들이 거기에 거주하고 이 나라의 선량한 시민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국제 연맹의 위임을 받은 무슬림 또는 기독교 정부의 지배하에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의 인류는 기뻐합니다. 만약 그들이 국가를 구성하고 이 지역에서 주권을 주장하고자 한다면, 저는 매우 심각한 위험을 예견합니다. 그들과 다른 종족 사이에 갈등이 있을 것이라고 두려워합니다.[21]

1922년 백서를 언급하면서 처칠은 나중에 "유대인 국가의 궁극적인 수립을 금지하는 것은 없습니다."라고 썼다. 그리고 비공개적으로 많은 영국 관리들이 유대인 다수가 달성되면 국가가 수립될 것이라는 시오니스트의 해석에 동의했다.

1921년 7월 21일, 차임 바이츠만은 런던 발포어의 집에서 처칠, 로이드 조지, 발포어와 만났고, 로이드 조지와 발포어는 바이츠만에게 "그들은 선언을 통해 항상 궁극적인 유대인 국가를 의미했다"고 확신시켰다.[22] 로이드 조지는 1937년 유대인들이 "주민의 확실한 다수가 된 경우" 팔레스타인이 유대인 연방이 될 것이라고 의도했다고 말했고, 레오 에이머리도 1946년에 같은 입장을 되풀이했다. 1947년 유엔 특별 위원회 보고서는 국토 대 국가 문제를 면밀히 조사하여 로이드 조지와 유사한 결론에 도달했다.

팔레스타인 내에 유대인의 국토가 건설될 것이라는 진술이 "팔레스타인의"가 아닌 "팔레스타인 내에"로 표현된 것은 의도적인 것이었다. 로스차일드가 발포에게 보낸 7월 12일 편지에 담긴 선언문 초안에는 "팔레스타인이 유대인 민족의 국가적 고향으로 재건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언급되었다. 밀너 경의 수정안을 거친 최종 본문에서는 "재건된"이라는 단어가 삭제되었고 "그것이"라는 단어는 "내에"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문구는 팔레스타인 전체를 유대인의 국가적 고향으로 규정하는 것을 피함으로써, 특히 수정주의 시온주의 진영에서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과 트란스요르단 왕국 전체를 유대인의 고향으로 주장하면서, 향후 수년간 의도된 범위를 둘러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1922년 처칠 백서에서 "선언의 조항들은 팔레스타인 전체를 유대인의 국가적 고향으로 전환하는 것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고향이 '팔레스타인 내에' 건설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명확히 밝혔다.

3. 역사적 배경

오스만 제국(터키 제국으로도 알려짐)은 1916년에 팔레스타인을 지배한 지 400년이 되었다.[4] 이 기간 대부분 유대인 인구는 전체 인구의 약 3%를 차지하는 소수 민족이었으며, 무슬림이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고 기독교인이 두 번째로 큰 비율을 차지했다.[4]

콘스탄티노플의 오스만 정부는 제1차 알리야가 시작됨에 따라 1882년 말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이민에 제한을 두기 시작했다. 이 이민은 지역 주민들과의 긴장을 야기했지만, 1901년 오스만 중앙 정부는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에서 아랍인과 동등한 토지 구매권을 부여했고, 1914년까지 유대인 인구 비율은 7%로 증가했다. 동시에 젊은 터키인(1908년 제국을 장악한 터키 민족주의자)에 대한 불신과 제2차 알리야가 커지면서 아랍 민족주의와 팔레스타인 민족주의가 급부상했고, 팔레스타인에서는 반시온주의가 이러한 세력을 하나로 묶는 특징이 되었다.

1923년 1월, 영국 정부는 밸푸어 선언의 배경과 동기를 규명하기 위해 당시 알려진 외무부와 전쟁 내각 기록을 요약하여 선언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설명하는 비공개 내각 각서를 작성했다. 첨부된 외무부 메모는 선언의 주요 작성자로 밸푸어, 사이크스, 바이츠만, 소콜로우를 언급하며, "아마도 로스차일드 경이 배후 인물로 등장한다"고 주장하고, "협상은 주로 구두로 진행되고, 매우 적은 기록만 남아 있는 사적인 메모와 각서를 통해 이루어진 것 같다"고 밝혔다.

1936년 총파업이 발생하자 영국 왕립 위원회는 6개월간의 작업 끝에 404쪽 분량의 보고서를 1937년 6월에 완성하고 한 달 후에 발표했다. 보고서는 밸푸어 선언의 기원에 대한 자세한 요약을 포함하여 문제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 요약의 상당 부분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의 개인적인 증언에 의존했다. 그는 위원회에 선언이 "선전 목적으로... 특히 유대인의 동정심은 미국의 유대인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독일이 군사적 약속을 줄이고 동부 전선에서 경제적 입지를 개선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2년 후, 그의 『평화 회의 회상록』에서 로이드 조지는 총리로서 선언 발표를 결정한 동기를 아홉 가지 요인으로 설명했는데, 여기에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이 존재하면 수에즈 운하에서 영국의 입장을 강화하고 인도 제국으로 가는 길을 강화한다는 추가적인 이유도 포함된다.

이러한 지정학적 계산은 그 후 수년 동안 논의되고 토론되었다. 역사가들은 영국이 지원을 표명하는 것이 독일과 미국의 유대인들에게 호소력이 있다고 믿었다는 데 동의한다. 또한 그들은 러시아의 많은 유대인 인구로부터 지지를 얻기를 바랐다. 또한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국제 행정을 요구하는 프랑스의 예상되는 압력을 선제적으로 차단하려고 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영국 정부의 결정이 미국과 러시아 모두에서 유대인의 힘을 과대평가한, 제임스 젤빈(UCLA 중동사 교수)이 '귀족적 반유대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시온주의는 아직 초기 단계였다. 그러나 시온주의 단체들은 최근 미국 유대인 사회 내에서의 무력 시위 이후 유대인 문제 전체를 토론하기 위한 유대인 의회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미국 유대인 대중 내의 권력 균형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 정부의 추정치에 영향을 미쳤다.

아비 슐라임(옥스포드 대학교 국제 관계 명예 교수)은 밸푸어 선언의 주요 원동력에 대한 질문에 대해 두 가지 주요 사상 학교가 발전되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레너드 스타인이 제시했고, 다른 하나는 마이르 베레테가 제시했다. 슐라임은 스타인이 명확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지만, 그의 서술에 암시적으로 선언이 주로 시온주의자들의 활동과 기술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베레테에 따르면, 그것은 중동에서 영국의 제국적 이익에 의해 동기가 부여된 치밀한 실용주의자들의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하이파 대학교 유대인 역사 교수인 대니 굿트바인은 오래된 생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며, 사이크스가 1917년 2월 시온주의자들에게 접근한 것이 결정적인 순간이었으며, 오스만 제국을 분할하려는 정부의 광범위한 의제 추구와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역사가 J. C. 후레위츠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고향을 지원하는 영국의 행동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영토를 합병하여 이집트와 페르시아 만 사이의 육교를 확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썼다.

밸푸어 선언은 영국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거주지(국가적 보금자리) 건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그 지원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이 방침은 1915년 10월, 영국의 이집트 고등판무관 헨리 맥머혼이 아랍 지도자인 메카 총독 후세인 빈 알리와 체결한 '''후세인-맥머혼 협정'''(맥머혼 선언)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여 문제가 되었다. 이 협정에서 영국 정부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제1차 세계 대전)에 협력하는 것을 조건으로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아랍인들의 독립을 승인한다고 밝혔다. 후세인은 이 영국 정부의 지원 약속을 받아 헤자즈 왕국을 건국했다.

한편으로는 팔레스타인에서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유대인들에게 지원을 약속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랍인들에게도 독립을 승인한다는 영국 정부의 '''이중 외교'''가 현재까지 이어지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원인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후세인-맥머혼 협정에 규정된 아랍 국가의 범위에 팔레스타인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두 가지는 모순되지 않는다. 후세인 빈 알리는 예루살렘시의 통치권을 제외하고는 지중해 쪽 팔레스타인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이, 후일 그의 아들 파이살과 하임 바이츠만 박사와의 회담에서 증명되었다. 참고로 발포어 선언 원문에는 "유대 국가"가 아니라,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national home"(내셔널 홈, '''민족 고토''')로 표현되어 있으며, 팔레스타인 원주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명시되어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지 2년이 지난 1916년 여름, 전쟁은 소모전 양상을 띠고 있었고, 영국이 강화를 모색하고 있던 때, 독일 거주 시오니스트들이 영국 전시 내각에 나타나 “포기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미국이 영국의 편에 서서 싸운다면 영국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미국이 영국의 편이 되어 독일과 싸우도록 보장하겠습니다. 약속은 단 하나입니다. 전승 후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라고 제안했다. 같은 해 10월, 영국은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유대인들은 러시아에서 강한 박해를 받고 있었고, 미국으로 피난한 유대인들은 러시아가 패배하기를 원했기에, 그때까지 미국의 신문들은 독일에 호의적인 보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거래가 성립되자 미국의 신문 여론은 일변하여 온갖 선전이 시작되면서 사악한 독일을 물리치자는 여론이 미국에서 형성되었다. 반독 선전에 의한 반독일 미국 여론, 짐머만 전보, 독일 잠수함에 의한 미국 선박 격침 등으로 1917년 4월 6일, 미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미국의 참전이 결정되자 시오니스트들은 영국에 가서 약속 이행을 요구했다. 같은 해 10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도 선언 발표에 동의했고[49], 같은 해 11월 2일, 유대인들이 미국 사회를 움직일 힘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 영국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자치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영국 정부가 승인하고, 그 목적을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발포어 선언을 발표했다.[50]

3. 1.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 시온주의 운동의 태동

19세기 후반, 유럽에서는 반유대주의와 배타적인 민족주의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러한 흐름에 대한 반응으로 시온주의가 등장했다.[3] 1896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기자 테오도르 헤르츨은 Der Judenstaat(유대인 국가)를 출판하여, 유럽의 "유대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유대인 국가 건설을 주장했다.

1897년, 헤르츨은 세계 시온주의 기구를 설립했다. 이 기구는 제1 시온주의 회의에서 "공법에 따라 보장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보금자리"를 건설할 것을 촉구했다. 이를 위해 유대인 정착을 장려하고,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조직하며, 유대인의 의식을 강화하고, 정부 보조금을 얻기 위한 준비 단계를 밟는 등의 조치가 제안되었다.

1897년 제1 시온주의 회의에서 승인된 "바젤 강령". 첫 번째 줄은 "시온주의는 공법에 따라 보장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보금자리(''Heimstätte'')를 건설하고자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1904년, 훗날 세계 시온주의 기구 의장이자 초대 이스라엘 대통령이 되는 하임 바이츠만스위스에서 영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1905년-1906년 총선에서 아서 밸푸어를 만났다. 이 만남은 밸푸어의 유대인 선거구 대표였던 찰스 드레이퍼스가 주선했다.

밸푸어는 이 회의에서 바이츠만에게 1903년 우간다 계획에 대한 반대 의견을 물었다. 이 계획은 조셉 챔벌린이 헤르츨에게 제안했던 것으로, 영국 동아프리카의 일부를 유대인들의 조국으로 제공하는 것이었다. 바이츠만은 유대인이 예루살렘과 맺는 관계는 영국인이 런던과 맺는 관계와 같다고 답했다.

3. 2. 제1차 세계 대전과 영국의 중동 정책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 발발 이후, 영국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전략의 일환으로 중동 지역에서 아랍 민족주의시온주의를 이용하려 했다. 1915년, 영국은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과 후세인-맥마흔 서신을 교환하며 전후 아랍 독립 국가 건설을 약속했다.[4] (단, 팔레스타인의 귀속 문제는 모호하게 남겨둠)

1916년, 영국은 프랑스, 러시아와 비밀리에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체결하여 오스만 제국 영토 분할 계획을 세웠다. (팔레스타인은 국제 관리 구역으로 설정)

1917년,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이끄는 영국 전시 내각은 시온주의에 대한 지지를 공식화하기로 결정했다.[40] 이는 연합국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고, 특히 미국의 참전을 유도하며, 러시아유대인들의 영향력을 활용하며, 독일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41]

4. 발포어 선언의 발표와 반응 (1917년)

시오니즘은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일어난 반유대주의와 배타적인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반응으로 생겨났다.[3] 낭만적 민족주의는 중부 유럽 및 동부 유럽에서 하스칼라(유대 계몽 운동)를 촉발하는 데 기여했으며, 유대교를 자신의 종교로 보는 사람들과 유대교를 자신의 민족 또는 국가로 보는 사람들 사이에 유대 공동체 내에 분열을 야기했다.[3] 1881년부터 1884년까지 러시아 제국 내에서 일어난 반유대주의 포그롬은 호베베이 시온 조직 결성, 레온 핀스커의 ''자기 해방(Autoemancipation)'' 출판, 팔레스타인으로의 첫 번째 주요 유대인 이민(제1 알리야)으로 이어지며 유대 민족 정체성 성장을 촉진했다.

1896년,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살던 유대인 기자 테오도르 헤르츨은 ''Der Judenstaat''("유대인의 국가")를 출판하여 유럽의 "유대인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유대인 국가 설립이라고 주장했다. 1년 후, 헤르츨은 세계 시온주의 기구를 설립했고, 제1 시온주의 회의에서 "공법에 따라 보장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보금자리" 설립을 촉구했다. 헤르츨은 이스라엘 건국 44년 전인 1904년에 사망하여, 자신의 계획을 수행할 정치적 지위를 얻지 못했다.

하임 바이츠만은 1904년 영국으로 이주하여 아서 밸푸어를 만났고, 이 회의에서 밸푸어는 1903년 우간다 계획에 대한 바이츠만의 반대 의견을 물었다. 바이츠만은 유대인이 예루살렘과 맺는 관계는 영국인이 런던과 맺는 관계와 같다고 답했다. 1914년, 바이츠만은 에드몽 드 로스차일드 남작을 만나 히브리 대학교 건설 프로젝트를 논의했다. 로스차일드 남작은 제1 알리야의 유대인 농업 식민지에 자금을 지원했다. 이후 그의 아들 제임스 드 로스차일드가 바이츠만에게 영국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관계가 발전했다. 바이츠만은 로지카 로스차일드를 통해 찰스 로스차일드와 월터 로스차일드, 제2대 로스차일드 남작을 만났다.

선언 이전, 영국 유대인 30만 명 중 약 8,000명이 시온주의 기구에 속했고, 전 세계적으로는 1913년 기준 약 1%였다.

1915년 말, 영국 이집트 고등판무관 헨리 맥마흔은 후세인과 10통의 서신을 교환하며, 후세인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키는 대가로 아랍의 독립을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은 "다마스쿠스, 호мс, 하마, 알레포 지역" 서쪽의 "시리아 일부"를 제외했다.[27] 팔레스타인이 이 제외 범위에 포함되는지에 대한 논쟁은 수십 년 동안 계속되었다.

아랍 반란은 1916년 6월 5일에 시작되었지만, 3주도 채 지나지 않아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사이ക്스-피코 협정을 체결했다. 밸푸어는 이를 1915년 협정이 "잊혀진 것 같다"고 말하며 지역 분할을 위한 "완전히 새로운 방법"이라고 설명했다.[27]

마크 사이ക്스 경과 프랑수아 조르주 피코는 1915년 말과 1916년 초에 이 조약을 협상했고, 1916년 1월 5일 공동 각서 초안에 주요 합의를 명시했다. 사이ക്스는 영국의 중동 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피코는 프랑스 외교관이었다. 이 협정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삼국 협상이 오스만 제국을 물리칠 경우 서아시아에서 영향권과 통제권을 제안하는 지역을 정의했고, 많은 아랍 영토를 영국과 프랑스 관리 지역으로 나누었다. 팔레스타인은 국제화를 제안했고, 러시아 및 후세인과 협의 후 행정 형태를 확정할 예정이었다. 초안에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이익, 그리고 "전 세계 유대인 공동체가 이 나라의 미래에 양심적이고 감정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언급되었다.

선언문은 1917년 11월 9일에 언론에 공개되었다. 가자와 야파는 며칠 만에 함락되었고, 예루살렘은 12월 9일에 영국군에 항복했다. 1917년 11월 23일 ''이즈베스티야''와 ''프라우다'', 11월 26일 ''맨체스터 가디언''에 사이ക്스-피코 협정이 공개되면서 연합군의 동부 전선은 극적인 순간을 맞았다. "영국은 당황했고, 아랍인들은 실망했으며, 터키인들은 기뻐했다."[30]

발표 이후,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밸푸어 선언에 대해 즉각적이고 격렬하게 반대했다.

4. 1. 영국의 입장

1917년 11월 2일, 당시 영국 외무장관이었던 아서 밸푸어는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인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서한을 보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민족의 고향을 건설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영국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했다.[49] 영국 정부는 이 선언을 통해 시오니즘 운동에 대한 지지를 표명함과 동시에 팔레스타인 내 비유대인 공동체의 권리, 그리고 다른 국가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권리 역시 보호할 것임을 약속했다.[50]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영국 내각은 오스만 제국에 대한 영국의 선전포고 4일 후인 1914년 11월 9일에 처음으로 팔레스타인에 대해 논의했다. 이 회의에서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팔레스타인의 궁극적인 운명"을 언급했다. 그는 이후 총리가 되었고, 최종적으로 선언에 책임이 있었다.

1915년 1월 21일자 영국 내각 문서에 게재된 허버트 새뮤얼의 내각 보고서, ''팔레스타인의 미래''


1914년 12월, 시온주의를 연구한 영국 내각 구성원 허버트 새뮤얼바이츠만의 요구가 너무 적다고 생각했다. 1915년 1월, 새뮤얼은 ''팔레스타인의 미래''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전 세계 시온주의 운동 지도자들에게 가장 환영받을 만한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책은 이 나라를 영국 제국에 병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915년 말, 영국 이집트 고등판무관 헨리 맥마흔은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과 10통의 서신을 교환했는데, 후세인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키는 대가로 "메카의 세리프가 제안한 한계와 경계 내에서" 아랍의 독립을 인정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다마스쿠스, 호мс, 하마, 알레포 지역" 서쪽에 있는 "시리아의 일부"를 제외했다. 전쟁 후 수십 년 동안, 팔레스타인이 이 해안 배제의 범위에 포함되는지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다.

아랍 반란은 1916년 6월 5일에 시작되었는데, 이는 서신 교환에서 이루어진 상호 합의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3주도 채 지나지 않아 영국, 프랑스, 러시아 정부는 비밀리에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체결했다.

이 영국-프랑스 조약은 1915년 말과 1916년 초에 마크 사이크스 경과 프랑수아 조르주 피코 사이에서 협상되었으며, 주요 합의는 1916년 1월 5일 공동 각서 초안에 명시되어 있다. 그들의 협정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삼국 협상이 오스만 제국을 물리치는 데 성공할 경우 서아시아에서 영향권과 통제권을 제안하는 지역을 정의했고, 많은 아랍 영토를 영국과 프랑스가 관리하는 지역으로 나누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국제화가 제안되었다.

1916년 12월 H. H. 애스퀴스가 이끄는 내각을 대체한 로이드 조지와 그의 내각의 집권으로 영국 정치 측면에서 변화가 생겼다. 로이드 조지와 그의 외무장관으로 임명된 밸푸어는 전후 오스만 제국의 분할을 주요 영국 전쟁 목표로 지지한 반면, 애스퀴스와 그의 외무장관인 에드워드 그레이 경은 오스만 제국의 개혁을 지지했다.

선언에서 명시된 영국 정책은 이후 수많은 문제에 직면했다. 1919년 10월, 커존 경이 발포어의 뒤를 이어 외무장관이 되었다. 커즌은 선언을 승인한 1917년 내각의 일원이었으며, "당시 영국 정부에서 그 정책이 수십 년간의 아랍-유대인 적대감으로 이어질 것을 예측한 유일한 고위 인물"이었다.

1920년 8월, 팔린 위원회의 보고서는 "발포어 선언…은 의심할 여지없이 모든 문제의 시작점"이라고 지적했다.

영국의 여론과 정부는 시온주의에 대한 국가적 지원에 대해 점점 더 불리하게 변했다. 1922년 6월 처칠 백서가 발표된 후, 상원은 아이즐링턴 경이 제출한 동의안에 따라 발포어 선언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를 60대 25로 부결했다.

1923년 2월 정권 교체 후, 캐번디시는 내각을 위한 장황한 각서에서 팔레스타인 정책에 대한 비밀 검토의 기반을 마련했다. 1923년 6월, 스탠리 볼드윈은 내각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팔레스타인 정책을 다시 검토하고 영국이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어야 하는지, 그리고 남아 있다면 친시온주의 정책을 계속해야 하는지 여부를 전 내각에 조언했다. 내각은 1923년 7월 31일 이 위원회의 보고서를 승인했다.

선언의 어구는 발포어 선언을 시행한다는 명시적인 목적으로 위임 통치 팔레스타인을 창설한 법적 문서인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에 통합되었고, 마침내 1923년 9월에 공식화되었다. 선언 자체와 달리 위임 통치는 영국 정부에 대해 법적으로 구속력이 있었다.

4. 2. 국제 사회의 반응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 정부는 후세인-맥마흔 협정을 통해 아랍의 독립을 지지하는 듯했으나, 밸푸어 선언으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민족 고토(national home) 건설을 지지하여 '''이중 외교''' 논란을 빚었다. 이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후세인-맥마흔 협정에서 규정한 아랍 국가 범위에 팔레스타인이 포함되지 않았고, 후세인 빈 알리도 예루살렘 외 팔레스타인 지역에 관심이 없어 두 선언이 모순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50]

사이ക്스-피코 협정 역시 영국과 프랑스가 중동 지역을 분할하는 내용을 담아 논란이 됐지만, 시리아 다마스쿠스 부근 경계 설정이 모호한 점을 빼면 밸푸어 선언 및 후세인-맥마흔 협정과 크게 모순되지 않는다는 반론도 있다. 밸푸어는 의회에서 이를 명확히 설명했다.[50]

미국우드로 윌슨 대통령과 의회가 밸푸어 선언을 지지했고,[49] 1922년 로지-피시 결의안으로 이를 공식 승인했다.[36] 프랑스이탈리아도 1918년에 밸푸어 선언을 지지했다.[34]

일본은 1917년 12월, 세르비아 왕국의 시온주의 지도자 다비드 알발라가 미국 파견 중 망명 정부의 지지를 발표하며 처음으로 외국 정부 지지를 받았다.[34]

오스만 제국은 1918년 1월, 유대인 정착을 장려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해 영국에 맞섰다.[51]

4. 3. 시온주의자들의 반응

1917년 11월 9일 ''타임스''에 발표된 발포어 선언


발표 이후 시온주의자들은 발포어 선언을 열렬히 환영했으며, 이를 유대 민족 국가 건설의 초석으로 간주했다. 주요 신문에 발표된 것 외에도, 유대인 공동체 전역에 전단이 배포되었다. 이러한 전단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중앙 연합국에 넘겨진 정착촌뿐만 아니라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공동체에도 항공 투하되었다.

하임 바이츠만은 이 선언이 세 가지 효과, 즉 ① 유대인들이 1917년 3월 혁명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기 때문에 러시아가 독일의 동부 전선에 대한 압력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 ② 미국의 거대한 유대인 공동체가 미국의 전쟁 노력에 대한 더 큰 자금 지원을 촉구하게 하는 것, ③ 독일 유대인들의 빌헬름 2세 황제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선언으로 인해 미국의 시온주의 지지자들이 예상보다 훨씬 많이 증가했다. 1914년 200개의 미국 시온주의 단체는 총 7,500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었지만, 1918년에는 600개 단체에 3만 명, 1919년에는 14만 9천 명으로 늘어났다. 영국은 이 선언이 유대 사상에서 시온주의적 입장의 이미 확립된 우세를 반영한다고 생각했지만, 이 선언 자체가 시온주의의 정당성과 지도력에 대한 책임이 되었다.

선언 발표 정확히 한 달 후,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대규모 기념 행사가 열렸는데, 시온주의 지도자들과 사이크스를 포함한 영국 행정부 관계자들이 연설했다. 1918년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영국 위임 통치령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11월 2일을 매년 국가 공휴일인 발푸어 데이로 기념했다. 이 기념 행사에는 학교 및 기타 공공 기관에서 열린 행사와 히브리어 언론의 축제 기사가 포함되었다. 1919년 8월 발포어바이츠만의 요청에 따라 영국 위임 통치령 팔레스타인의 전후 최초 정착지를 그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발푸리아"로 명명했다. 이곳은 팔레스타인에서 미국의 유대인 활동을 위한 모범적인 정착지가 될 예정이었다.

1915년 각서를 통해 영국 내각에서의 논의 시작을 주도했던 시온주의 국회의원 허버트 새뮤얼은 1920년 4월 24일 로이드 조지로부터 전쟁 이후 이 지역을 통치했던 이전의 군사 행정을 대체할 최초의 영국 팔레스타인 민간 총독으로 활동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1920년 7월 직무를 시작한 직후, 그는 예루살렘 후르바 회당에서 이사야 40장의 하프타라를 낭독하도록 초청받았는데,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는 오래된 정착민들의 회중으로 하여금 "고대 예언의 성취가 마침내 임박했을지도 모른다"고 느끼게 했다.

4. 4.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반응

당시 팔레스타인 인구의 약 90%를 차지했던 기독교 및 이슬람 공동체는 밸푸어 선언에 강력하게 반대했다.[24] 이들은 이 선언을 영국이 아랍인과의 약속을 저버린 배신 행위로 간주했다.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철학자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 선언이 유럽 열강에 의해 비유럽 지역에 대해 내려졌으며, 그 지역 원주민 다수의 존재와 희망을 완전히 무시하고, 다른 외국 집단에 대한 약속의 형태를 취했다고 설명했다.[31]

1918년 11월 3일, 무슬림-기독교 협회 대표단은 무사 알후세이니를 수장으로 하여 밸푸어 선언 1주년을 기념하는 시온주의 위원회 행진 다음 날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이들은 100명이 넘는 저명 인사들의 서명이 담긴 청원서를 영국 군정 장관 로널드 스토어스에게 제출했다. 청원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들은 또한 유대인들이 내건 새로운 "흰색과 파란색 현수막"에 항의하며,[31] 현수막 게양에 따른 정치적 함의에 대해 영국 당국에 주의를 환기시켰다.[31] 같은 달, 영국이 야파를 점령한 1주년에 무슬림-기독교 협회는 유대 국가 수립에 반대하는 장문의 각서와 청원서를 군정 장관에게 보냈다.

영국 군 지도자 대다수는 밸푸어 선언을 실수이거나 심각한 위험을 초래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아랍 세계 전반에서는 이 선언을 영국이 아랍인들과 맺은 전시 합의를 배반한 것으로 여겼다. 메카의 샤리프와 다른 아랍 지도자들은 이 선언을 맥마흔-후세인 서신 교환에서 이전에 약속한 내용을 위반한 것으로 간주했다.

이 선언이 이집트 신문 ''알 무카탐''[32]에 발표된 후, 영국은 1918년 1월 데이비드 조지 호가스 사령관을 파견하여 후세인을 만나게 했다. 호가스가 전달한 메시지는 팔레스타인 주민의 "정치적, 경제적 자유"가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5] 호가스는 후세인이 "팔레스타인에 독립적인 유대 국가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나 또한 그러한 국가가 대영제국에 의해 고려되고 있다는 경고를 그에게 하라는 지시를 받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후세인은 1917년 12월 소비에트 연방 정부에 의해 유출된 사이ക്스-피코 협정을 알게 되었지만, 맥마흔을 대신하여 이집트 고등판무관이 된 레지널드 윙게이트 경이 보낸 두 건의 불성실한 메시지에 만족했는데, 이 메시지는 아랍에 대한 영국의 약속이 여전히 유효하며 사이ക്스-피코 협정은 공식 조약이 아니라고 확신시켰다.[5]

1918년 동안에도 연합국의 의도에 대한 아랍의 불안은 영국의 7개국 선언과 영불 선언으로 이어졌는데, 후자는 "오랫동안 터키인들에게 억압받아 온 사람들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방과 토착 주민의 자유로운 의지와 선택에서 권위를 얻는 국가 정부와 행정부의 설립"을 약속했다.[5][33]

1919년 후세인 국왕은 베르사유 조약 비준을 거부했다. 1920년 2월 이후 영국은 그에게 보조금 지급을 중단했다. 1920년 8월, 세브르 조약 체결 5일 후, 커즌은 카이로에 요청하여 후세인의 두 조약 서명을 얻고 서명을 조건으로 3만 파운드를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후세인은 거절했고, 1921년에는 "팔레스타인을 시온주의자들에게, 시리아를 외국인들에게 할당하는 문서에 자신의 이름을 붙일 수 없다"고 말했다. 1921년 카이로 회의 이후 로렌스는 국왕의 조약 서명과 베르사유 조약 및 세브르 조약 서명을 얻기 위해 파견되었고, 연간 6만 파운드의 보조금이 제안되었지만 이 시도도 실패했다. 1923년 영국은 후세인과 미해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번 더 시도했지만, 다시 실패했고, 후세인은 밸푸어 선언이나 자신이 자신의 영토로 여기는 모든 위임 통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1924년 3월, 조약에서 문제가 되는 조항을 삭제할 가능성을 잠시 고려한 정부는 추가 협상을 중단했고, 6개월 안에 그들은 압둘아지즈 이븐사우드를 지지하기 위해 지원을 철회했고, 그는 후세인의 왕국을 정복했다.

5. 발포어 선언 이후의 전개 과정

영국 이집트 고등판무관 헨리 맥마흔은 1915년 말 10통의 서신을 통해 후세인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키는 대가로 "메카의 세리프가 제안한 한계와 경계 내에서" 아랍의 독립을 인정할 것을 약속했다. 이 약속은 "다마스쿠스, 호므스, 하마, 알레포 지역" 서쪽에 있는 "시리아의 일부"를 제외했다.[4] 전쟁 후 수십 년 동안, 팔레스타인이 다마스쿠스 남서쪽에 위치해 있고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해안 배제의 범위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다.[4]

아랍 반란은 1916년 6월 5일에 시작되었는데,[50] 이는 서신 교환에서 이루어진 상호 합의에 따른 것이었다.[51] 그러나 3주도 채 지나지 않아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비밀리에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체결했는데, 이는 밸푸어가 나중에 1915년 협정이 "잊혀진 것 같다"고 말한 후 지역을 분할하기 위한 "완전히 새로운 방법"이라고 설명했다.[27]

이 영국-프랑스 조약은 1915년 말과 1916년 초에 마크 사이크스 경과 프랑수아 조르주-피코 사이에서 협상되었으며, 주요 합의는 1916년 1월 5일 공동 각서 초안에 명시되어 있다.[52] 사이크스는 영국의 보수당 국회의원으로, 드 뷜센 위원회와 아랍 사무국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영국의 중동 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피코는 프랑스 외교관이자 베이루트 전 총영사였다. 이들의 협정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삼국 협상이 오스만 제국을 물리치면 서아시아에서 영향권과 통제권을 제안하는 지역을 정의했고,[5] 많은 아랍 영토를 영국과 프랑스가 관리하는 지역으로 나누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국제화가 제안되었고,[5] 러시아 및 후세인과의 협의 후 행정 형태가 확정될 예정이었다.[5] 1월 초안에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이익, 그리고 "전 세계 유대인 공동체 구성원들이 이 나라의 미래에 양심적이고 감정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언급되었다.[52]

그 이전까지 시오니스트들과의 적극적인 협상은 없었지만, 사이크스는 시오니즘을 알고 있었고, 영국 시오니스트 연맹의 전 회장인 모세 가스터와 접촉했으며, 새뮤얼의 1915년 보고서를 보았을 수도 있다. 1917년 2월 7일, 사이크스는 사적인 자격으로 시온주의 지도부와 실질적인 논의를 시작했다. 이전의 영국과 "아랍인들" 사이의 서신이 회의에서 논의되었고, 사이크스는 "아랍인들은 언어가 (팔레스타인의 통제를 결정하는) 척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척도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전체를 주장할 수 있다. 그래도 아랍인들은 특히 다른 문제에서 유대인의 지원을 받는다면 관리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사이크스의 목표 중 하나는 팔레스타인에서 영국의 종주권이라는 대의명분에 시온주의를 동원하여 그 목표를 지지하기 위해 프랑스에 제시할 논거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발푸어 선언으로 이어지는 영국 전쟁 내각의 논의 기간 동안, 전쟁은 교착 상태에 있었다. 서부 전선에서는 1918년 봄 독일이 봄 공세를 펼치면서 중앙 연합국 쪽으로 전세가 기울었지만, 1918년 7월부터 연합군 쪽으로 전세가 결정적으로 기울었다.] 미국은 1917년 봄에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지만, 1917년 11월 2일까지 첫 번째 사상자를 내지 않았다. 당시

5. 1. 영국의 위임 통치 (1920-1948)

1914년 10월, 헨리 맥마흔후세인-맥마흔 서한을 통해 전후 아랍인의 독립 국가 건설을 지지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영국1920년 산레모 회의에서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를 맡게 되었고, 밸푸어 선언은 위임 통치 문서에 포함되었다.[52] 이는 영국의 모순된 행동으로 전후 유대인 세력과 아랍 세력의 분쟁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1922년, 영국은 처칠 백서를 발표하여 밸푸어 선언의 의미를 축소 해석하려 했으나, 팔레스타인 내 아랍인과 유대인 간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1930년대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영국 통치에 반대하는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고, 영국은 이를 진압했다.

1939년, 영국은 맥도널드 백서를 발표하여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 이민을 제한하고, 10년 내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유대인 국가 건설을 명시적으로 부정하는 내용이었다.

5. 2. 이스라엘 건국과 팔레스타인 문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 연합(UN)은 1947년 팔레스타인 분할 결의를 채택하여 팔레스타인을 유대 국가와 아랍 국가로 분할하려 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독립 선언과 함께 제1차 중동 전쟁이 발발했고, 이 전쟁의 결과로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가 발생했다.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 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를 점령했다. 1988년 11월 15일 팔레스타인 독립 선언이 이루어졌고, 1994년 오슬로 협정에 따라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완전한 독립 국가로서의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6. 발포어 선언에 대한 평가와 비판

밸푸어 선언은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거주지(국가적 보금자리) 건설을 지지한다는 공식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1915년 10월 영국의 이집트 고등판무관 헨리 맥마흔이 아랍 지도자인 메카 총독 후세인 빈 알리와 체결한 '''후세인-맥마흔 협정'''(맥마흔 선언)과 모순된다는 비판이 있다. 이 협정에서 영국 정부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제1차 세계 대전)에 협력하는 조건으로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아랍인들의 독립을 승인한다고 밝혔다. 후세인은 이 약속을 받아 헤자즈 왕국을 건국했다.

한편으로는 팔레스타인에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유대인들에게 지원을 약속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랍인들에게도 독립을 승인한다는 영국 정부의 '''이중 외교'''가 현재까지 이어지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원인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후세인-맥마흔 협정에 규정된 아랍 국가의 범위에 팔레스타인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두 가지는 모순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후세인 빈 알리는 예루살렘시의 통치권을 제외하고는 지중해 쪽 팔레스타인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이, 후일 그의 아들 파이살과 하임 바이츠만 박사와의 회담에서 증명되었다. 참고로 밸푸어 선언 원문에는 "유대 국가"가 아니라,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national home"(내셔널 홈, '''민족 고토''')로 표현되어 있으며, 팔레스타인 원주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명시되어 있다.

더욱이, 이 두 가지 약속은 1916년 5월 영국, 프랑스, 러시아 사이에 체결된 비밀 협정, '''사이ക്스-피코 협정'''과도 모순되는 것처럼 보여 문제가 되었지만, 내용을 보면 실제로는 시리아 다마스쿠스 부근의 경계 설정이 모호한 것 외에는 특별히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메소포타미아는 영국의 자유 재량→보호국으로서의 아랍인 주권 국가 이라크 탄생.
  • 레바논은 프랑스의 위임 통치→레바논은 후세인-맥마흔 서한에서 규정된 아랍 국가의 범위 밖이다.(후세인-맥마흔 협정도 참조)
  • 시리아는 프랑스의 보호하에 아랍인 주권 국가가 된다→이것 또한 후세인-맥마흔 서한의 내용과 크게 모순되지 않는다. 다만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 부근에 대해서는 프랑스 통치령인지 아랍 지역인지 모호한 부분이 남았다.
  • 팔레스타인에 관해서는, 상술한 바와 같이 "거주지"로서의 해석도 있으며, 후세인-맥마흔 서한에서 규정된 아랍 국가의 범위 밖이다. 어디까지나 거주지이기 때문에 국제 관리를 규정하는 사이크스-피코 협정과 모순되지 않는다. 따라서 적어도 발포어 선언과 다른 두 개의 협정 사이에는, 문면상으로는 아무런 모순도 없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지 2년이 지난 1916년 여름, 전쟁은 소모전 양상을 띠고 있었고, 영국이 강화를 모색하고 있던 때, 독일 거주 시오니스트들이 영국 전시 내각에 나타나 “포기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미국이 영국의 편에 서서 싸운다면 영국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미국이 영국의 편이 되어 독일과 싸우도록 보장하겠습니다. 약속은 단 하나입니다. 전승 후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라고 제안했다. 같은 해 10월, 영국은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유대인들은 러시아에서 강한 박해를 받고 있었고, 미국으로 피난한 유대인들은 러시아가 패배하기를 원했기에, 그때까지 미국의 신문들은 독일에 호의적인 보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거래가 성립되자 미국의 신문 여론은 일변하여 온갖 선전이 시작되면서 사악한 독일을 물리치자는 여론이 미국에서 형성되었다. 반독 선전에 의한 반독일 미국 여론, 짐머만 전보, 독일 잠수함에 의한 미국 선박 격침 등으로 1917년 4월 6일, 미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미국의 참전이 결정되자 시오니스트들은 영국에 가서 약속 이행을 요구했다. 같은 해 10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도 선언 발표에 동의했고[49], 같은 해 11월 2일, 유대인들이 미국 사회를 움직일 힘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 영국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자치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영국 정부가 승인하고, 그 목적을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발포어 선언을 발표했다.[5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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